평론 - 결의 이유(대구예술발전소 입주작가 비평글) - 이정화(미술비평) 2019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5-08-15 12:16본문
2019 대구예술발전소 입주작가 비평글
결의 이유
이정화(미술비평)
"내가 꽉 잡고 절대 놓고 있지 않는게 뭘까. 이번 작업의 시작은 여기서 부터였다."
2011년 대구문화예술회관 5전시실에서 열린 두 번째 <정해경 현대문인
화전> 책자에서 작가는 이 문장으로 글을 시작한다. 작품을 들여다보면,
한지 위에 먹으로 쓴 글자 파편들이 놓이고, 그 글자 파편 위에 한지가 겹
치고, 그 한지 위에 먹으로 쓴 다른 글자 파편들이 조형을 이루고, 그 파편
의 조형 위에 또 한지가 겹치고, 그 한지 위에 또 다른 먹의 글자 파편들이
조형을 이루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이어져 하나의 작품을 구성하고 있다.
이 독특한 한지 콜라주는 한때 뜻을 지닌, 먹으로 쓴 문자가 그 뜻을 알 수
없는 형태로 회귀하고, 그 회귀하여 파편화한 형이 작품에서 새로운 표현
을 이루는 선 혹은 면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애초에 어떤
의미를 지니던 단어 혹은 문장이 물질의 형태로 되돌아가, 새로운 조형의
가능성을 품은 선으로 돌아와서는, 평면 위에서 생동하며 리드미컬하게
흩어지거나 모이거나 추상적 형의 세계를 조형해 낸다.
어찌 보면 한지의 원시성 위에 새겨진 갑골문자 같기도 하고, 먹의 선들이
춤을 추며 폭포가 되거나 이파리가 되거나 바위가 되는 산수의 세계를 형
상화하는 듯하고, 문자의 파편이 저 스스로 어떤 세계를 만들어 내려고 춤
을 추거나 이주하거나 혹은 어떤 자력에 의해 이끌리는 듯한 움직임을 보
이는 듯도 하다. 작가의 표현처럼 그 먹 선들은 "넘치도록 펼치고 지우고,
숨을 고르고 (무언가를)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그리하여 한때 문자였던 이 먹 선은 그 뜻을 잃어 보다 추상적일지는 모르
나, 그 기원에 비하여 한결 자유로워 보인다. 그리고 문자가 지닌 의미를
내려놓은 자리게에 작가가 지향하는 어떤 세계가 나타난다. 그 세계가, 작
가가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으려는 무엇을 담고 있으리라.
도판1. 정해경, 한지꼴라쥬 2010, 150 x 118cm 한지, 먹
도판2. 정해경, 한지꼴라쥬 2011, 122 x 186cm 한지, 먹
반복에서 차이가
"모필로 연출되는 먹빛에 매료되어 시작한 서예는 자연스레 서예술의 본
질인 선에 천착하였고, 전 예 해 행 초를 익히며 간단하지 않은 필획으로
만들어진 다양한 선을 경험하였으며 또한 서예를 통하여 새로운 공간개념
과 필세를 통한 시간성의 의미를 자각하게 되고 내 안에 축적되었다. 서예
가 오랜 기간 선을 알아가는 수련의 기간이었다면 문인화를 전공하면서
그 선을 다양한 표정으로 나타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정해경 작가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서예를 했다. 친구 아버님의 권유로 서
예학원을 다니기 시작한 이후, 10년 가까이 글자를 익히고 글의 매력에 빠
져 지냈다. 문인화를 그리게 된 것은 대학원에 들어가면서인데, 선에 천착
한 이후 작가는 그 시기를 '선의 다양한 표정을 나타내는 과정'으로 설명
한다. 선에 대한 기본기를 익힌 작가는 이후 '움켜지고 있던 양손'를 놓는
다. 2011년이 작가에게는 그러한 변모의 움직임을 드러낸 시기로, 앞서
소개한 전시에서 마주하게 된 한지 콜라주가 그것이다.
'아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작가가 선택한 것은 그 과정에 대한 놓기, 일종
의 해체 작업이었다. 작가는 그 무수한 시간 동안 그린 서예 작품을 찢었
고, 그 찢어낸 한지조각을 버리는 대신 그것을 새로운 한지의 평면 위에 올
려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 냈다. 그러나 그 문자의 조각들은 이미 그 문자
가 지닌 뜻을 알 수 없으며, 다시금 새로운 형(形)으로 한지라는 지평 위에
놓여 있다. 작가는 반복해서 먹으로 그린 문자의 조각을 한지 위에 올리고
다시 그위에 새로운 한지를 놓고, 그 위에 문자 조각을 올리며 새로운 조형
을 창작해 냈다.
기본기를 다지는 오랜 수련의 과정이 있었기에, 그 지난한 반복의 과정이
있었기에 새로운 조형 실험을 향한 도약이 가능했다. 반복의 과정에서 생
명에 대한 의지가 움트고, 그 움튼 도약을 향한 의지가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자신이 긋고 싶은 선에 대한 의지를 붙잡고 우직하고 성실하게 글
자를 쓴 시간, 그 반복의 과정 속에서 글자들은 정형화된 의미를 내려놓는
대신 조형의 역동이 만들어 내는 자유로운 생명 에너지를 얻어냈다. 그러
한 조형 실험을 통해서 작가가 꽉 잡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도판3 정해경, 한지꼴라쥬, 2013, 160x130.0cm, 한지 먹.
도판4 정해경, 2014. 160x130.3cm 한지, 먹
자연의 그대로를
작가가 희구한 하나의 방향은 자연을 향한 것이다. 2015년 작가는 살아있는 자
연 그대로를 전시장에 가져왔다. 작가는 가창에 아크릴 상자를 가져가 30~40센
티미터의 흙을 퍼담아 그것을 그대로 두 달여 자연 상태에 둔다음, 전시장으로
옯겨왔다. 살아 있는 자연 그대로를 전시장에 옮기고 싶은 작가의 의지로 인해
가창의 가을 지표면 흙이 작가의 한지 작품 아래 놓였다. 설치적 특성과 회화적
특성이 결합된 이 작품은 무수히 놓여 있는 한지의 결이 자나가며 오고 있는 시
간을 담고 있으며, 그 아래 놓인 자연의 흙 역시 지난 시간의 결을 드러낸 위아
래 놓인 두 자연이 서로 어울린다.
그런가 하면 작가는 한지를 길게 찢어 위에서 아래로 겹쳐 붙이고, 마른 후 붙여
진 한지의 반을 일으켜 세워 한지 사이에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 반구형의 공간
으로 인하여 시간의 결은 그 평면 위에 하나의 새로운 국면을 생성했다. 필연적
으로 흘러가는 시간의 결 위에 우연의 한 사건, 그 공간에서 느껴지는 응축된 의
지. 작가의 결기가 느껴지는 지점이다.
도판5 정해경, Untitled. 2016, 160 x 130cm, 한지, 먹
도판6 정해경, Untitled, 160 x130cm, 한지, 먹
정해경 작가에게 2017년은 중요한 해로 보인다. 작품 세계에서도 변화가 보일
뿐더러 작가로서의 활동 반경도 넓어진 시기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2017년에
해외에서 개인전을 할 기회가 생겼고, 작품을 먼저 우편으로 보냈다. 그런데 파
리로 가야 할 작품은 세관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갔고, 상심 끝에 작가는 순발력
을 발휘하여 벽면에 철망과 포장용 비닐 끈으로 설치를 진행했다.
한쪽 벽면에는 작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특징을 드러내는 설치를, 한쪽 벽에는
이 상황에 대한 작가의 심경을 드러내는 문장을 불어로 적어 붙였다. 이 설치 퍼
포먼스는 관람객의 긍정적 반응을 이끌었으며, 작가에게도 중요한 계기가 된 것
으로 보인다. 안으로 향하던 시선이 보다 외부로 향하는, 자연에서 타자로 향하
는 듯한 변모의 모습이 드러난다.
도판7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갤러리 89 초대전에서 작가 즉흥적으로 작업한 설치작업 전경.
도판8 정해경, Untitled 2018, 48 x 48cm 한지, 먹, 기타재료
도판9 정해경, Untitled 2018 작품부분 이미지
결의 결에 대하여
정해경 작가의 최근 작업을 살펴보면, 자신의 내부로 향하던 시선이 이제는 보
다 바깥으로 향하는 경향을 읽을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의 일상 이야기를 바탕에
먹으로 쓴 다음 그 위에 한지를 겹겹이 쌓아 올리는 콜라쥬 형태의 작업을 진행
하는가 하면, 자신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의 이름을 차곡차곡 써 내려간 다음 그
위에 한지를 한 겹 한 겹 올리는 작업을 진행했다. 작가 자신에게 바탕으로 주어
진 것들을 하나씩 해체하여 새로운 조형실험으로 재해석하는 과정을 거친 다음,
이제 그 기본이 되는 평면 위에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삶이 드러나는 이야기
를 쓰거나 주변 사람에 대한 이름을 명명하는 행위를 작품 위에 새긴다.
그리고 최근에는 세계 기후변화의 위험 상황을 알리기 위해 광장에 모여 목소리
를 높인 청소년들의 이름도 새기려고 한다. 이전의 작가가 도달하려는 조형의
세계가 자기 수련의 과정처럼 여겨졌다면, 이제 작가는 자신의 조형세계 안에 세
계를 위해 선한 일을 행하는 이들의 이름을 담아 그들의 행위를 지지하고 자신
역시 그러한 일에 동참하려는 실천적 의지를 드러낸다.
작가가 겹겹이 쌓아 붙인 결의 공간 안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결코 작은 변화가
아니며, 우직하게 시간 안에서 자신의작업을 반복하고 또 반복하였던 그에게는
새로운 도약일 것이다.
도판10. 정해경, Untitled, 2019, 214 x 297cm, 한지. 먹. 기타재료
도판11. 정해경, Untitled, 2019, 214 x 297cm, 한지. 먹. 기타재료
도판12. 정해경, Untitled, 2019, 214 x 148.5cm, 한지. 먹. 기타재료
지난 11월에 있었던 대구예술발전소 입주작가 오픈 스튜디오에 참석해
사진 이미지로만 보던 정해경 작가의 작품을 실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작가의 한지 작품은 결이 곱고 섬세했으며, 오랜 시간을 들여 작업해 왔
음을 살필 수 있었다. 벽에 전시된 한지 오브제 작춤이 주변을 둘러싼
가운데 가운데는 설치 작품인 '대화의 방'이 놓여 있었다. 다리 높이가 다
르거나, 쿠션 위에 커다란 투명 공이 박혀 있어서 볼 때는 그저 좋으나
앉으면 불편함을 느낄 수 있는 의자 셋. 제각기 다른 처지와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의 현실을 의인화한 듯했다.
그 의자에 앉아 정해경 작가와 대화를 나누었다.
한지와 먹으로 기본 작업을 하고 난 다음 작가는 그 작품을 벽에 붙이고,
그 위에 먹으로 글씨를 쓰고, 또 그 위에 한지의 결을 입히는 작업을 더하
고 더한다. 정해경 작가의 작품은 현재의 근본 위에 시간이 갈 때마다
결이 더해진다. 영원 위에 찰나가 더해지듯, 작품은 시간의 넉넉한 품을
기본으로 가져간 채 순간의 결결이 더해지며 긴장을 입는다. 그래서 불변
하거나 종결된 회화 작품으로 마감하는 대신 설치적 특성이 더해져 가변
성과 즉흥성을 잠재태로 지니고 있다.
정해경 작가의 작품은 그 자체로 이미 완성이지만 언제든 새로운 결이 더
해질 여백을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아울러 그 혼종된 특성은 누구도 따라
할 수 없는 작가만의 세계를 만들어 냈다. 그 시간의 넉넉함은 지난 '시간
들'을 수련해 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정해경 작가에게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더 넓어진 지평. 그 다가올 시간들이 기대된다.
도판13. 정해경, 대화의 방, 2019, 가변 설치, 의자. 알루미늄관. 실. 유리
구슬. 이 설치 작품은 지난 7월에 열린 < 대구, 현대미술의 눈> 전 (2019.
7.31~8.11. 대구문화예술회관 2층 전시실 전관)에 출품했던 작품이며,
작가는 타인의 입장을 몸으로 느껴 보도록 의자의 다리를 잘라서 기울어
지게 하였고, 한 의자는 '자신의 빛나는 부분이 어느 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음'을 전달하려는 의도로 의자에 구슬을 박아 불편함을 느끼도
록 설치했다.
도판14. 15, 정해경 작가는 캔버스를 따로 사용하지 않으며, 작품이 완성
된 상태로 벽에 설치하는 것이 아니라 1차로 벽에 부착한 한지 위에 새로
운 한지를 겹겹이 올리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작가의 작업은 - 마치 영원
성 위에 찰나를 더하듯이- 전시될 때마다 기본 위에 새로운 한지 작업이 더
해진다. 사진은 대구예술발전소 레지던시 단기 입주작가로 참여하고 있
는 정해경 작가의 작업실 내에 전시된 작품들. 그리고 12월에 작가는 이
작품들을 마감하여 전시회를 열었다. 'Times of my life.'(12월 3~8, 대
구예술발전소 4층 스튜디오2)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